진중권의 생각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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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책 읽는 속도가 정말 엄청나게 느려졌다. 나이가 들어서 느려지기도 했고, 예전만큼 책 읽는데 시간을 쓰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읽을 책을 고르는 데 더 신중해야 하기도 한다. 쌓여있는 읽을 책 리스트는 엄청나게 많지만, 다 읽을 수가 없으니.
- 생각의 지도는 가장 최근에 구입한(몇 달 전) 책이다. 여전히 이름만으로 택하는 거의 유일한 저자의 책이다. 미학자로서 쓴 책들은, 처음 그의 책을 읽은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하고 오히려 더 재미있다. 이번에도 읽고 나니, 내가 뭔가 더 잘 알게 된 건 없어도 책 자체가 재미있고, 뭔가 뿌듯하다. 이번 책도 개정판인걸 보면 정치 관련 발언 논란이 있어도 인기가 식지는 않은 거 같다.
- 씨네 21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이라 짧은 글을 주제별로 묶어서 10개 장으로 이뤄져 있다. 생각같아서는 모든 글을 정리하고 싶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만 정리해봤다.
- 4부 13 - 눈에 뵈는 아무 증거 없어도 - 신앙주의에 관하여
-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누군가가 믿기 힘든 말을 하더라도 혹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배경으로 뒀다고 한다. 그냥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생각하라는 뜻이었으나 잘못 인용해왔던 것.
- 물론 신앙이 합리적이라면 이미 과학의 범주에 포함이 되거나 필요없어졌을테니 일견 맞기는 하다. 하지만 외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에서 증거를 얻고, 증거는 믿음을 통해진다는 건 명백한 순환논법의 오류이니(히브리서 11:1, 2절을 예로 들었음),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 창조과학은 신앙에 증거를 제시하려는 방법인데, 신앙주의가 반대하는 게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는 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증거주의에 발판을 둔 창조과학이 하는 일 - 현대 과학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 자체가 논리적 오류나 비약이다.
- ‘믿음이 증거를 앞선다’는 신앙주의는 수학의 공리와 같은 걸 생각해보면 꼭 틀린 것은 아니기는 하다. 수학에서는 공리를 통해 정리를 증명하고, 정리를 통해 명제를 증명하는데, 공리는 ‘증명 없이 참인 명제’이기 때문에 수학이라는 이성도 그 기초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법도 명령/조례의 올바름은 법률에 따라 판단하고, 법률은 헌법에 따라 판단을 하지만, 헌법 그 자체는 그런 증명이 필요가 없다. 헌법의 진리는 혁명이나 전쟁, 쿠데타에 의해 완결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작동하려면 화자들이 기본적인 신념을 공유해야 참/거짓을 따지는 언어놀이가 가능하다고 한다.
- 그런데 수학은 전 인류가, 헌법은 국민 전체가, 언어의 기본적 신념은 언어공동체가 공유하기 때문에 증명 없이 참으로 통하는 전제들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종교의 경우 신도와 비신도가 있고, 신도간에도 종파의 차이가 있어 공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증거없이 믿는 다는 게 불가능해지고, 신도에게는 공리이지만, 비신도에게는 증거를 봐야 믿을 수 있는 사건이 된다는 점.
- 여기서 약간 맥락이 다를 수 있지만, 시오노나나미의 종교의 유대인 철학의 그리스인 법의 로마인 설명이 생각이 났다. 종교는 믿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고, 철학은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지만, 법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된다는.
- 9부 - 예술의 진리
- 작가 이름과 작품명을 줄줄 외워대는 ‘지각’으로 예술을 대하지 말라. 송곳같은 ‘감각’을 되살려 예술에 숨어있는 진리를 마주하라
- 언제나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 고흐같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를 대할 때나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저런 감각을 얻기 위한 훈련이 정말 필요한데, 직접 작품을 대하고 느끼고 반추하는 등의 경험(훈련, 연습이란 말은 나에게는 과하니까)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그럴 환경이 되지 않으니 정말 아쉽다.
Written on April 13, 2017